종합병원의 기록

왼다리 깁스 생활 후기

기록하는 마케터 2017. 8. 2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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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다 왼발을 접질렸다. 접질린 당시엔 통증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유쥬얼 서스펙트>의 로저 버벨 킨트처럼 다리를 절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유쥬얼 서스펙트를 완벽히 오마주 하자(말도 안되는) 결심으로 물리치료를 받으러 정형외과에 갔다.

 

2.

병원에 들어갈 때는 다리를 절었을지언정, 나올 때는 완벽하게 정상적인 걸음으로 나오리라는 야무진 계획이었다. 하지만 <유주얼 서스펙트>급 반전은 따로 있었으니, ‘다리에 금이 갔으니 약 1달 간 깁스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이었다.

 

3.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애처로운 표정으로 기어코 꼭 깁스를 해야만 하겠는가하고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아마도 본인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무심한 표정으로 수술하고 싶으면 하지 말던가라고 응수했다. 의사 기에 완전히 눌린 나는 결국 눈물, 콧물 질질 짜며 깁스를 했다. (내 인생의 목표 중 하나가 죽을 때 까지 단 한 번도 수술하지 않고 사는 거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통 깁스가 아닌 반 깁스를 했다는 거.

 

4.

나는 반 깁스를 한 채 패잔병처럼 병원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 고로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 병원을 빠져나오고 난 후 5분이 채 되지 않아 나는 반 깁스와 함께 초능력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초능력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자동문 초능력이랄까. 그 어떤 단단하고 견고한 문도 내 앞에서는 제 스스로 열리는 자동문이 되고 만다. 1) 오른쪽 목발을 바닥에 2번 쿵쿵 내리 찧은 후 2) 1초 간 열고자 하는 문의 오른쪽 밑바닥 가장자리를 노려보며 3) ‘자동무우운하고 주문을 외면 문은 속절없이 열린다. 나의 이 자동문 초능력을 사용한다면 메시, 호날두를 능가하는 축구선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잠시 설렜다.

               

5.

문 언저리에만 가도 저 멀리서 달려와 문 열어드릴까요?’,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으며 호의를 베풀어 주신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린다. 엉엉. ‘네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밖에 감사를 표현할 수 없는 게 미안할 정도로 다들 감사했다. 내가 받은 호의들 올해 안에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돌려주고 말리다.

 

6.

살면서 처음으로(처음이자 마지막이리다) 다리에 반 깁스를 하고 난 후 알게 된 두 가지 깨달음이 있다. 첫번째, 생각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다리에 깁스한 채 목발 짚는 사람을 대놓고 구경한다는 것이다. 목발 짚는 게 힘이 겨워서 고개를 떨군 채 바닥만 보고 걷고 있었다. 땀도 나고 팔도 너무 아파 잠시 쉬었다 가려고 제자리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약 5~6명의 사람들이 내 눈 앞에 보였는데, 그들의 시선이 모두 어느 땅바닥 쪽 낮은 곳을 향해 있었다. 나는 ,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귀여운 애완동물에 정신이 쏙 팔렸구나. 나도 얼른 그 귀여운 애완동물을 구경 해야겠다싶어서 그 시선을 따라가보았더니 귀여운 나의 깁스한 왼다리가 나타났다.는 뭐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

 

7.

어떤 한 노인은 나의 목발 걸음이 신기했는지 가던 길을 멈추고는 약 10초 간 나를 구경하기도 했다. 당시 노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는데 그 표정은 정말이지, 진귀한 것을 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표정이었다. 저 정도의 표정이라면, 저 노인이 평소 일기를 쓰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 노인의 일기장 한 켠에 박제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조금 더 격정적인 퍼포먼스로 저 노인 관객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동방예의지국 국민으로써의 마땅한 도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어느 정도 부담을 느꼈다.는 뭐 그런 아무도 믿지 않을 얘기.

 

8.

한번은 나 포함 총 5명의 사람이 엘레베이터에 탔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그 누구도, 그 어떤 말도 내뱉지 않으며 침묵을 지켰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총 10개의 눈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이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나의 왼발을 정착지로 삼았다. 세간의 주목을 받은 나의 왼발은 순간 쑥스러움을 느꼈고, 정면을 향해 있던 왼발이 오른쪽으로 약 30도 정도 기울여지며 이내 부끄럽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는 뭐 그런 말도 안되는 얘기.

 

9.

두번째, 세상에는 친절한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나는 젠장할 다리 다치기 전에 접수해 두었던 토익 시험을 치러 갔다. 본격적으로 시험지를 나눠 받기 전에, 교탁 앞으로 소지한 휴대폰을 제출해야 했다. 1) 주섬주섬 목발을 주워서 2) 소름 끼치는 의자 끄는 소리를 내고는 3) 낑낑대며 한걸음 한걸음 위대한 발걸음을 내딛으며 교탁까지 가는 내 모습을 4) 교실에 있는 온 사람들에게 생중계하기는 (많이 과장해 보자면) 죽기보다 더 싫었다.

 

10.

그래서 나는 내 휴대폰을 대신 제출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해 내 생에 가장 민첩한 동작으로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한 여자분과 우연히도(?) 눈이 마주칠 수 있었고, 그 분은 내가 어떤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내 휴대폰을 받아선 교탁에 제출해주었다. 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대화도 없었다. 그저 0.1초 간의 눈맞춤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과정은 마치 토익 시험을 보러 온 게 아니라 나 대신 휴대폰을 제출해주러 온 사람인줄 착각할 정도로 유려하고 자연스러웠다. 아아. 무심하게 친절한 사람들.

 

11.

시험이 끝나고 제출한 휴대폰을 가져다가 다시 책상에 앉아 대기하는 시간이 왔다. 나는 시험이 끝나면 엄마가 교실로 데리러 오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어차피 나가는 길목에 휴대폰이 있으니, 나는 굳이 휴대폰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뒤에 앉아있던 남자 분이 지금 휴대폰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의 의도가 (한 줄 한 줄, 차례차례 휴대폰을 찾아가라는 감독관의 지시를 의식한) ‘지금 우리가 앉은 줄이 찾아가는 차례가 맞냐?’인 줄 알고 , . 맞아요.’라고 답했다. 그런데 나의 답변에 다시 날아온 질문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였다. 그제서야 나는 그 분이 나를 위해 대신 휴대폰을 가져다 주는, 엄청난 친절을 베풀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의 뒤에 앉아있던 분은 내가 따로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휴대폰을 대신 찾아다 주었다. 아아. 세심하게 친절한 사람들.

 

12.

깁스를 하고 나니 예상치 못하게 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과 도움을 받으며 지내고 있다. 세상 아직 살만하구나. 싶은 마음을 넘어 다들 왜 이렇게까지 나에게 친절한 걸까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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