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독가의 기록

<대리사회> - 김민섭

기록하는 마케터 2017. 4. 2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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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저자의 신작


`309 1201`라는 필명으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펴냈던김민섭작가의 신작 <대리사회>가 출간됐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리사회>를 구매한 이유는, 오로지 그의 전작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원생도, 시간강사도 아니지만 그의 이야기가 꼭 나의 이야기 같았고, 그가 꼭 나 같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아빠에게이거 완전 내 얘기야하면서 책을 추천하기도 했다. 학교를 나와 카카오택시 드라이버로 대리운전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기사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럼 이제 글은 안 쓰시는 건가 해서 아쉬워했는데, 너무 반갑게도 그의 신작 <대리사회>를 만날 수 있었다.

 

<대리사회>인가


이 책은내가/우리가 이 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책이다. 책의 구성은 크게 1부 통제되는 감각들, 2부 대리인간이 되는 가족들, 3부 주체가 될 수 없는 대리노동들로 이루어진다. 타인의 운전석에서 행위, , 사유의 통제를 겪었던 대리인간 이야기, 버텨내기 위해 대리인간이 되는 가족들의 이야기, 주체가 될 수 없는 대리노동에 대한 논의들이 다양한 에피소드 속에서 녹여져 나온다.

 

나는 그동안 내가 대리인간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이 글은 "내가/우리가 이 사회에서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 (…) 타인의 운전석에서 나는 세 가지의 '통제'를 경험했다. 우선 운전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행위'의 통제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고 깜빡이를 켜는, 그런 간단한 조작 외에는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 다음으로 ''의 통제다. 손님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대리기사는 거의 없다. (...) 마지막으로 '사유'의 통제다. 주체적으로 행위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와도 같다.” - p8

 

호칭은 한 인간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최근 회사에서 외부 디자이너에게인턴님이라고 불렸던 적이 있다. ‘인턴님이라고 적혀진 메신저 창을 보면서, ‘인턴이라는 글자가 너무 안 어울리는 것 아닌가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공간에서 나는 나 OOO이기 이전에, ‘인턴이었던 것이다. 나의 이름이 갑자기 기억나지 않은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최선의 단어 선택이었겠지만, ‘인턴님이라는 세 글자로 규정 지어진 그 순간의 씁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첫 손님은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아저씨'라고 불렀고, 나는 그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누구도 자신을 어떻게 호칭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는 아저씨가 되고 그는 사장님이 되었다. 만약 내가 여성이었으면 아가씨, 혹은 아줌마로 호칭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호칭에는 듣는 대상의 자존감이나 주체성을 갉아먹는 힘이 있었다. 모든 관계는 호칭에서부터 그 범위가 상상되고, 확장 또는 축소된다. 호칭을 결정할 자유를 빼앗겼을 때부터 나의 신체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다.” - p52

 

그런데 '아내'를 대체할 만한 적합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호칭이 되어서는 안 될 단어들이 대부분이었다. '마누라'는 오래된 존칭이라고는 하지만 그 어원과 관계없이 오염된 단어다. 눈을 부라리거나 밥상을 뒤엎는 그런 못난 남편의 모습이 우선 연상된다. 여러 서사에서 비하의 의미로 수차례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OO엄마' 역시 아이를 담보로 아내의 주체성을 훼손하는 것 같아서 역시 사용하고 싶지 않다. 나는 'OO아빠'라는 호칭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나의 일상을 규정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집사람'이나 '안사람'은 여성의 활동 범위를 '' ''으로 각각 제한하고 규정짓는다. 안의 주체는 여성으로, 바깥의 주체는 남성으로, 그렇게 공간에 따른 역할을 나눈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서 고착화되는 것은 주로 여성이다.” - p120

 

소통은 주체가 된 이들의 논리를 확인하고 강요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다.

 

내 상사는 회의 중 질문을 참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 질문들은 순수한 질문이 아니라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치사한 질문들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순수하게 그 질문에 대한나의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나의 답이 아닌 상사가 이미 정해놓은 모범답안으로 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부터는나의 답을 생각하지 않고,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먼저 고민했고 듣고 싶어하는 말들만 해주었다. 소통은 그저 상사의 생각을 확인하고 강요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뭐라고 답해야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하고 우선 눈치를 살핀다. 괜히 손님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타인의 운전석,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 어디에나 있을 '을의 공간'은 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할 존재를 위축시킨다. 그래서 결국 어느 대화에 주체로서 참여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그가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간단한 문제와는 다르다.” - p31

 

소통은 주체가 된 이들의 논리를 확인하고 강요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다. 부하 직원은 직장 상사에게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학생은 교사의 의도에서 벗어난 답을 제출하지 않는다. 아이 역시 부모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털어놓지 않는다.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p35

 

그러고 보면 을의 자리에서는 단어 하나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라는 부사 하나로도 나는 오만 가지 상상을 했다. 많이, 적당히, 조금, 이러한 모호한 부사들은 듣는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다. 우리는 갑의 자리에서 별 생각 없이 툭툭 말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헛기침이나 하품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말조심'은 을이 아니라 오히려 갑이 더 해야 하는 것이었다. 글을 쓸 때 쉼표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말을 할 때도 그렇게 조심을 해야겠다. 의미 없는 단어로, 몸짓으로,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 말아야겠다.” - p184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는 책

 

이 작가가 잘 됐으면 좋겠다. 책도 많이 팔려서 이 작가의 또 다른 신작을 읽고 싶다. 왠지 이 작가가 잘 된다면, 나도 잘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외에도을의 대리전쟁’, ‘대리인간이 되는 가족등 다양한 논의들이 전개된다. 또한대리사회에 대한 논의 외에도 대리기사의 삶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대리기사는 집에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는데, 이 궁금증을 해결해 준다!) 사람 사는 이야기, 끔찍한 사회 이야기, 그럼에도 살만한 사회 이야기 모두 담겨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그래도 무일푼으로 공간을 점유하고 있기가 민망해 K에게 "저한테 왜 이리 잘해 주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저는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그뿐이에요"하고 답했다. 그는 내가 쓴 '지방시'라는 글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 p187

 

주체로써 존재하고, 타인을 주체로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이외 인상 깊었던 구절/이야기들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는 법을 점차 잊어가고 있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러한 통제에 익숙해진 대리인간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틀을 만들고,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끊임없이 불편해하고,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요된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 믿으며 타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 p10

 

모두가 존중할 만한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라는 전에 없던 자각, 노동은 그러한 성찰을 가능케 했다. - p18

 

"나는/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한다. - p22

 

일하는 도중에 배가 너무 아팠다. 백화점 화장실에 가려다가 상가 건물의 화장실이 의외로 개방되어 있어서 들어왔다. 깨끗하다. 대리운전을 하기 위해 조절해야 할 게 많다. 물을 마시고 싶어도, 배출하고 싶어도 조절해야 한다. 내 신체도 나의 것이 아니고 이미 타인에게 대리를 주었다. - p39

 

일상은 한없이 평온하다가도 어느 날 이렇게 가혹하게 다가온다. - p101

 

며칠 전에는 거의 의식을 잃고 자던 30대 남성이 있었다. 10분 가까이 갖은 방법을 다 써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혹시, 하고 그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는 그 작은 전화벨 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흠칫, 하고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몸을 세차게 흔드는 것보다도 오히려 핸드폰의 알람이나 벨소리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마다 자신의 소리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이제는 몇 번 몸을 흔들다가 핸드폰 알람을 아주 크게 켜놓기로 했다. 누군가에게는 회사에 늦지 않기 위한 소리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아내의 전화일 것이다. - p131

 

실제로 강태공은 아내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제후가 된 자신을 찾아온 아내의 앞에 물 한동이를 쏟아붓고는 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가 얼마나 아내를 원망했는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부부는/가족은 한 동이의 물을 함께 지고 버티는 존재다. 하지만 강태공도 허생도 물동이를 지려고 하지 않았다. 조금만 버티면 그것을 내려놓게 해주겠다면서 그 역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물이 가득 찬 물동이를 홀로 위태롭게 지고 있던 한 여인은, 결국 그것을 놓아버렸다. 물을 쏟은 책임은 우선 자신의 역할을 외면한 이들에게 있다. 그러나 강태공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대신 아내를 원망했다. 허생 역시 아내에게7년 동안 홀로 물동이를 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아내에게 자신의 '대리인간'이 되기를 강요했다. - p150

 

삶의 무게는 힘겹지만, 어떻게든 그 누구도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 당신도 나도 잘 버텨내기를 바란다. 어서 돌아가 물동이의 무거운 부분을 내가 받치고 싶다. - p152

 

노동의 관계도는 가장 간단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계약의 주체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용자는 그 중간에 '대리인'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주체로서 감당해야 할 여러 책임에서 벗어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 p172

 

지역 대리업체의 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을 만나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을 하며 친해진 카카오 기사 두엇과는 "이거 카카오 쓰다가 어디서 맞는 거 아닙니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뭐랄까, '동류'이지만 '동료'가 될 수 없는 사이였다. 카카오와 비카카오 기사들 간에는 그러한 위화감이 흘렀다.자본을 가진 갑과 갑의 전쟁에서 피해자가 된 것은 결국 노동의 주체인 ''이었다. 너와 나를 구분하고 어느 편에 서야만 했으며, 그렇게 자연스레 '갑의 대리인'으로서 참전했다. (...) 내 앞을 막아선 것은 갑이 아닌 을이었다. 대학의 구조에 문제를 제기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었다. 동료였던 이들과 마지막 술자리에서, 나는 당신들이 나를 응원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 대학이라는 ''은 전쟁의 주체로 나서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인들이 자연스럽게 그 전쟁을 수행하게 했다. 그런데 나의 앞을 막아선 그들을 미워할 수가 없다. 나 역시 갑을 위한 '대리전쟁'에 수차례 동원되어 왔기 때문이다. - p181

 

내 주변에는 자신의 지도교수를 아버지로 표현하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지도교수가 그들을 아들로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한 관계 설정은 많은 문제를 만들어냈다. 교수-학생, 교직원-근로조교 아르바이트는 가족이 아니다. 가족적 우애가 노동에 대입되는 것은 전근대적인 폭력이 되기 쉽다. 그 과정에서 많은 비상식이 상식으로, 비합리가 합리로 탈바꿈하게 된다. 나는 그런 것을 충분히 보아왔다. - p194

 

'힐링'이라는 단어의 소멸 이후 '분노' '혐오'가 우리 사회를 뒤덮었다. 개인들은 이제 더 이상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둘러싼 구조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N포 세대'로 대변되는 허무와 고독, '노오력'이나 '헬조선'이라는 비아냥과 냉소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차근차근 임계를 향하던 개인의 감정들이 최근에 이르러 실체를 드러냈을 뿐이다. - p213

 

대리운전은 정말이지 요정이 다녀간 것과 같은 노동이다. 웬만해서는 타엔에게 운전석을 허락하지 않는 이들도 처음 대면하는 대리기사에게는 순순히 키를 내준다. 그는 갑자기 어디에선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서 자신을 사장님이라 부르고는 집까지 대신 운전해 준다. 그리고 주차까지 마무리하고 곧 사라진다. 그가 다녀갔다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덕분에 만취 상태에서도 차와 함께 무사히 귀가해서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편히 잠에 든다. 대리기사들뿐 아니라 여기저기에 보이지 않는 요정이 산다. 누군가의 수고를 덜어주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항상 존재한다. 타인이 버린 쓰레기와 배설물을 치우고, 사고를 대신 처리해 주고, 모두가 꺼리는 그 어떤 번거로운 일을 대신해 준다. 그러니가 이것은 '대리노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사실 노동의 본질은 '대리'. 우리는 스스로 하기 어렵거나 귀찮은 일을 타인에게 대가를 주고 대신하게 한다. 하지만 과정의 수고로움은 잘 드러나지 않고 결과만이 남는다는 점에서 노동 그 자체는 대게 은폐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노동하는 모두는 누군가에게는 요정이다.  - p241

 

나는 경계에서 한 걸음 스스로 물러난 특별한 인간이 아니다. 다만, 밀려났을 뿐이다. 내가 어떤 부조리에 맞서고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원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동안 그 누구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밀려나고서야, 희미하게나마 보이던 그 균열을 들여다보았다. 스스로 물러났다면 지금 나의 삶은 조금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그동안 나아가는 법만 배워왔지 물러서야 한다고는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공간에서의 패배를 고백하는 것이고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의미와도 같다. 무엇보다도 '우리'에서 이탈해 고립되기를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경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그런 평범한 개인이었다. - p 249

 

그 누구도 가르쳐 준 바 없지만, 결국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밀려나기는 쉽지만 스스로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그러고 나면 시스템의 균열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사회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다. 그때부터는사유하는 주체가 된다. 여전히 행동과 언어는 통제될지라도, 정의로움을 판단하고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다만, 한 걸음만 물러설 용기를 가지면 된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지, 스스로 물러서고 다시 나아오는 주체가 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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