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독가의 기록

맨 부커 수상자, 한강의 <흰>

기록하는 마케터 2017. 4. 30.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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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부커 수상자한강


한강작가가 아시아 최초, 한국인 최초로 맨 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했다. 맨 부커 상은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다. 맨 부커 수상으로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줄줄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화제가 됐다.

 

맨 부커 수상 소식을 듣고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왜인지 서점에 들르면 다른 책을 고르게 되었다. 아무래도 알게 모르게 한강 작가의 작품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듯 하다. 그리고 마침내 밀린 숙제를 하듯 한강 작가의 작품 <>을 읽었다!

 

<>은 강보, 배내옷, 각설탕 등의 소재로 풀어낸더럽혀지지 않는, 절대로 더럽혀질 수가 없는 어떤 흰 것에 관한 65개의 이야기. 네다섯장 읽었을 때 쯤 들었던 생각은이 좋은 작품을 이제야 읽다니!’였다. 두세장 더 읽었을 때쯤 들었던 생각은이거 시집인가? 수필인가?’였다. 한 편의 시처럼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수려했고, 이야기 하나 하나는 한 편의 작품처럼 모두 밀도 높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필사하고 싶다.’였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다. J

 

필사하고 싶은 구절 

 

숨을 들이쉬며 한순간씩 더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눈처럼 하얀 강보에 갓 태어난 아기가 꼭꼭 싸여 있다. 자궁은 어떤 장소보다 비좁고 따뜻한 곳이었을 테니. 갑자기 한계 없이 넓어진 공간에 소스라칠까봐 간호사가 힘주어 몸을 감싸준 것이다. 이제 처음 허파로 숨쉬기 시작한 사람. 자신이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방금 무엇이 시작됐는지 모르는 사람. 갓 태어난 새와 강아지보다 무력한, 여린 짐승들 중에서 가장 어린 짐승. 피를 너무 흘려 창백해진 여자가 그 아기의 울고 있는 얼굴을 본다. 당황하며 강보째로 아기를 받아 안는다. 그 울음을 멎게 하는 법을 아직 모르는 사람. 믿을 수 없는 고통을 방금까지 겪은 사람. 아기가 별안한 울음을 멈춘다. 어떤 냄새 때문일 것이다. 또는 둘이 아직 연결되어 있다. 보지 못하는 아기의 검은 눈이 여자의 얼굴 쪽을 -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 향한다. 무엇이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채. 아직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 피냄새가 떠도는 침묵 속에서. 하얀 강보를 몸과 몸 사이에 두고.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른 것이 이 죽음이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나는 자랐다. 어린 짐승들 중에서도 가장 무력한 짐승.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 그이가 죽은 자리에서 내가 태어나 자랐다는 이야기.

 

새벽만큼 짙진 않지만 아직 반투명한 트레이싱지 같은 안개가 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외투를 꺼내 입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뒷모습에, 무엇인가 견디기 시작한 사람들의 묵묵한 예감이 배어있다.

 

언젠가 만년설이 보이는 방에서 살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한 적 있다. 창 가까이 서 있는 나무들이 봄에서 여름, 가을에서 겨울로 몸을 바꾸는 동안 먼 산 위엔 언제나 얼음이 얼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열감기에 걸린 그녀의 이마를 번갈아 짚어보던 어른들의 차가운 손처럼.

 

부서지는 순간마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러려면 상처가 없는 발이어야겠지. 사진을 들여다보다 그녀는 생각했다. 곱게 아문 두 발이라야 거기 얹을 수 있다. 그 소금 산에. 아무리 희게 빛나도 그늘이 서늘한.

 

새로 빨아 바짝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 그녀의 맨살이 닿을 때. 순면의 흰 천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잠과 생시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순면의 침대보에 맨살이 닿을 때 그녀는 그렇게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후미진 주택가 건물 아래를 걷던 늦여름 오후에 그녀는 봤다. 어떤 여자가 삼층 베란다 끝에서 빨래를 걷다가 실수로 일부를 떨어뜨렸다. 손수건 한 장이 가장 느리게. 마지막으로 떨어졌다. 날개를 반쯤 접은 새처럼. 머뭇머뭇 내려앉을 데를 살피는 혼처럼.

 

사람들은 왜 은과 금,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광물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걸까? 일설에 의하면 물의 반짝임이 옛 인간들에게 생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빛나는 물은 깨끗한 물이다. 마실 수 있는 - 생명을 주는 - 물만이 투명하다. 사막을, 숲을, 더러운 늪지대를 무리지어 헤매다가 멀리서 하얗게 반짝이는 수면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느낀 건 찌르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생명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무대에 오른 순간, 강한 조명이 천장에서부터 쏘아져 내려와 그녀를 비췄다. 그러자 무대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 검은 바다가 되었다. 객석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저 해저 같은 어둠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 내려갈 것인지, 이 빛의 섬에서 더 버틸 것인지.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것들에게서 돌아서기 전에 그녀는 묻는다.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만일 삶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사이 그녀는 굽이진 모퉁이를 돌아간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문득 뒤돌아본다 해도 그동안 자신이 겪은 어떤 것도 한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 길은 눈이나 서리 대신 연하고 끈덕진 연둣빛 봄풀들로 덮여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팔락이며 날아가는 흰나비가 그녀의 눈길을 잡아채고, 떨며 번민하는 혼 같은 그 날갯짓을 따라 그녀가 몇 걸음 더 나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제야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숨막히는 낯선 향기를 뿜고 있다는 사실을, 더 무성해지기 위해 위로, 허공으로, 밝은 쪽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당신 올 수 있다면 지금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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