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독가의 기록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82년생 김지영>

기록하는 마케터 2017. 7. 1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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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줄 요약 :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삶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소설

 

<82년생 김지영>82년에 한국에서 여자로 태어난 김지영씨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200쪽이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모든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너무 과장 되지 않게,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사건들이 담담히 전개된다.

 

82년도에 태어난 여자 아이들 중 가장 많은 이름이 김지영이라고 한다. 그래서 82년도에 태어나 여자로 살아가고 있을 수많은 김지영들을 대변해 나온 것이 바로 <82년생 김지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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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꿍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되짚어 봤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좋아한다면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그래야 하는 거다. 그게 여덟 살 김지영 씨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 아이의 괴롭힘 때문에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이제껏 당해 온 것도 억울한데, 친구를 오해하는 나쁜 아이가 되기까지 했다. 김지영 씨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너무 싫어요.” 다음 날 자리를 다시 정했다. 김지영 씨는 키가 가장 커서 늘 맨 뒷자리에 혼자 앉았던 남학생과 짝꿍이 되었고, 둘은 단 한 번도 다투지 않았다. -p41,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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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았던 문단이다. 불합리한 일에 대항해 원하는 바를 성취해내는 경험.

 

급식 먹는 순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번호 순서대로 배식하니 뒷번호 아이들은 늦게 급식을 받게 되고, 늦게 먹을 수밖에 없다. 매번 1번부터 밥을 받는 것은 뒷번호 아이들에게 불리하다. 배식 순서를 정기적으로 바꿔야 한다. 유나는 교단에 선 선생님을 똑바로 보면서 차분하게 또박또박 말했고, 선생님은 변함없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실룩였다. 교실 분위기는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처럼 아슬아슬했다. 말하고 있는 건 유나인에 김지영 씨가 너무 긴장돼서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런데 잠시 유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선생님이 싱긋, 웃더니 대답했다. “다음 주부터는 49번부터 거꾸로 배식 받는다. 한 달에 한번씩 순서를 바꾸자.” 끝 번호 여자 아이들이 환호를 질렀다. 급식실에 들어가는 순서는 바뀌었지만 급식실 안의 분위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선생님은 여전히 밥 늦게 먹는 것을 싫어했고, 체할 정도로 윽박질렀고, 할머니 떡볶이집 멤버 여섯 명 중 두 명은 계속 하위 그룹에 속했다. 김지영 씨는 어차피 중간 번호라 배식 순서가 크게 바뀌진 않았는데, 왠지 늦게 먹으면 지는 기분이 들어 악착같이 밥을 먹었고 하위 그룹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작은 성취감을 느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절대 권력자에게 항의해서 바꾸었다. 유나에게도, 김지영 씨에게도, 끝 번호 여자아이들 모두에게 소중한 경험이었다. 약간의 비판 의식과 자신감 같은 것이 생겼는데, 그런데도 그때는 몰랐다. 왜 남학생부터 번호를 매기는지, 남자가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이고, 남자가 먼저인 것이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남자 아이들이 먼저 줄을 서고, 먼저 이동하고, 먼저 발표하고, 먼저 숙제 검사를 받는 동안 여자아이들은 조금은 지루해하면서, 가끔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주민등록번호가 남자는 1로 시작하고 여자는 2로 시작하는 것을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살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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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나이에 초경을 시작했다. 초경이 시작된 그 날 저녁 아빠한테 큰 꽃다발을 선물 받았다. 배가 너무 아프고 이것저것 불편해 불쾌했는데, 꽃다발을 받고 나니 내게 나쁜 일이 일어난 건 아니구나 싶었다.

 

김지영씨를 보면서 누구나 축하 받으며 초경을 시작하는 건 아니구나 깨달았다. 나쁜 일이 벌어진 것 마냥 쉬쉬하며 초경을 시작해야 할 어린 여자아이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내가 다 그 어린 아이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아버지께 꽃다발을 받았다는 친구도 있었고, 가족들과 케이크를 자르며 파티를 열었다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엄마, 언니, 여동생과만 공유하는 비밀일뿐이다. 귀찮고 아프고 왠지 부끄러운 비밀. 김지영 씨네 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직접 언급을 피하며 라면 국물만 떠주었다. 그날 밤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언니의 옆에 누워 김지영 씨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차분히 되짚어 봤다. 월경과 라면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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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는 꼭 변태 남자 선생이 있었다. 여기저기 휘휘 돌아다니며 여학생들의 엉덩이를 회초리로 툭툭 치던 선생, 어깨를 잡아 일으키면 될 것을 굳이 가슴 언저리에 손을 쭉 뻗어 일으키던 선생 등.

 

학교라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굳이 팔뚝 안쪽으로 손을 넣어 부드러운 살을 꼬집고, 다 큰 아이들의 엉덩이를 두드리거나 브래지어 끈이 지나는 등 가운데를 쓰다듬는 남자 교사가 꼭 있었다. 1학년 때 담임은 50대 남자였는데, 검지만 펼친 모양의 손가락 지시봉을 들고 다니면서 이름표 검사를 핑계로 반 아이들의 가슴을 쿡쿡 찌르고, 교복 검사를 핑계로 치마를 들추곤 했다. 한번은 조회를 마친 담임이 깜빡 잊고 지시봉을 교탁에 두고 나갔는데, 자주 이름표 검사를 당했던 가슴 큰 아이가 성큼성큼 나와 교실 바닥에 지시봉을 내던지고 발로 사정없이 밟아 부수며 울었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얼른 깨진 조각을 모아 치웠고, 단짝 친구가 그 아이를 안고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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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한 남자 선배와 식사 자리를 가졌다. 최근 아이를 낳아 와이프는 회사를 휴직했다고 한다. 어느 날 출근 하려는데 와이프가 난 너랑 똑같이 공부해서 똑같은 학교, 똑같은 과 나와서 똑같이 고생했는데, 왜 난 지금 일도 못하고 애만 돌보고, 너는 잘난 척 하면서 회사 다니는 거지? 억울해.’라고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다 억울했다.

 

4학년이 되면서 웬만한 취업 설명회나 선배와의 만남 자리는 빠지지 않았는데, 적어도 김지영 씨가 갔던 행사장에 여자 선배는 없었다. 김지영 씨가 졸업하던 2005, 한 취업 정보 사이트에서 100여 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여성 채용 비율은 29.6퍼센트였다. 겨우 그 수치를 두고도 여풍이 거세다고들 했다. 같은 해 50대 대기업 인사 담당자 설문 조사에서는 비슷한 조건이라면 남성 지원자를 선호한다는 대답이 44퍼센트였고 여성을 선호한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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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공감 가는 에피소드였다. 아무렇지 않게, 그것이 폭력적인 말인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언사를 내뱉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다.

 

시간이 늦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조바심 내면서 헤매기 싫어 곧바로 택시를 탔다.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할아버지 기사님은 룸미러로 김지영 씨를 한번 흘끔 보더니 면접 가시나 보네, 했다. 김지영 씨는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 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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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이 요 앞 대학에 다니거든. 지금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제 집에 간다고 무서우니까 데리러 오라네. 미안한데 나는 먼저 갈 테니까, 김지영 씨, 이거 다 마셔야 된다!” 김지영 씨는 겨우 붙잡고 있던 어떤 줄 하나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의 그 소중한 딸도 몇 년 후에 나처럼 될지 몰라, 당신이 계속 나를 이렇게 대하는 한.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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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나 제도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일까, 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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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 봐.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고 감동적인 일이야. 그리고 정말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최악의 경우에, 네가 회사 그만두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 질게. 너보고 돈 벌어 오라고 안 해.” “그래서 오빠는 잃는 건 뭔데?” “?”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 나도나도 지금 같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집에 일찍 와야 하니까 친구들도 잘 못 만날 거고. 회식이나 야근도 편하게 못할 거고. 일하고 와서 또 집안일 도우려먼 피곤할 거고. 그리고 그, 너랑 우리 애랑, 가장으로서그래, 부양! 부양하려면 책임감도 엄청 클 거고.”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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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누군가의 엄마, 성별로 특색 지어 생각하기 이전에 그 사람 자체에 집중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립글로스를 사 들고 김지영 씨의 집에 놀러 왔다. “립글로스는 뭐야?” “나 지금 바른 거. 색깔 괜찮지? 우리 피부톤 비슷해서 잘 받는 색도 비슷하잖아.” 엄마도 여자라거나, 집에만 퍼져 있지 말고 좀 꾸미라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선물한다. .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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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보고, 빨래하고, 청소하고손목을 안 쓸 수가 없어요.” 김지영 씨가 푸념하듯 낮게 말하자 할아버지 의사는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 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아요.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 다니면서 닦고 빨고 널지도 않고요. 저 의사는 세탁기, 청소기를 써 보기는 한 걸까. 의사는 모니터에 뜬 김지영 씨의 이전 치료 기록들을 훑어본 후, 모유 수유를 해도 괜찮은 약들로 처방하겠다고 말하며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다.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찾아다니면서 결제 받고 그랬는데, 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 p148,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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